
Ahn Seong-Gi
안성기
Also Known As: Ahn Sung-ki, An Sung-gi
안성기
Also Known As: Ahn Sung-ki, An Sung-gi
Job: | Actor |
Date of birth: | January 01, 1952 |
Height: | 175cm |
Weight: | 72kg |
Country: | Daegu, South Korea |
About Ahn Seong-Gi
Bloodtype: RH+ AB
Religion: Catholic
서울 돈암 국민학교, 경동 중학교(국민가수 조용필과 동기동창), 동성 고등학교를 거쳐 한국외국어대 베트남어과를 졸업했다.
영화 기획과 제작에 종사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글도 배우기 전에 영화에 출연했는데, 57년 김기영 감독의 <황혼 열차>가 그의 첫 출연작이다. 이 영화를 필두로 그는 왠만한 영화의 아역은 도맡아 하였다. 이 가운데 1959년에 <10대의>에 출연해 대종상의 전신인 문교부 영화상의 문교부 장관상과 샌프란시스코의 영화상 골든 특별상(아역)을 받았다. 그러나 영화와 학교 생활을 병행하기가 힘들어 <얄개전>(59)을 마지막으로 70여 편의 출연 영화를 끝으로 아역 배우로서는 은막을 은퇴하였다. 이후 3수 끝에 외국어대 베트남어학과(1971년)에 진학하였다. 졸업 후 베트남으로 진출할 뜻을 가지고 있던 그는 ROTC를지원, 임관하면서 참모총장상을 받을만큼 열심히 했지만 이미 월남이 패망한 뒤라 전방에서 포병 장교로 군생활을 마쳤다. 제대후에는 중앙대 연극영화과 대학원에 지원했는데 공부도 쉽지않아 결국 한 학기만에 도중하차했다.
그러던 중 아버지의 권유로 1978년 김기영 감독의 <병사와 아가씨들>에 출연했다. 그러나 관객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고, 그 뒤에도 <제3공작>, <야시>, <우요일> 등에 조연으로 출연했으나 적응하기가 쉽지 않고, 반응 또한 기대 이하였다. 그러나 그의 진짜 재출발 선언은 대마초 해금 사건으로 돌아온 이장호 감독의 재기작 <바람불어 좋은 날>(80)로 이루어졌다. 이 영화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는 그 어느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최고의 연기를 보여 주었다. 특히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물 게 계산된 연기와 철저한 사전 준비, 그리고 천부적 재능과 끊임없는 자기 변신에의 노력은 수많은 영화제의 수상과 함께 국내 정상의 자리에 그를 올려놓았다.
임권택 감독의 <만다라>(81), <안개마을>(81)을 찍은 후 같은 세대의 배창호 감독과 짝을 이루어 8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루었고 조금 과장된 말로 그 당시 한국영화는 안성기가 나온 영화와 나오지 않는 영화로 로 구분될 정도 였다.
흥행은 물론 작품성도 모두 성공적이었다. 특히 <적도의 꽃>(83), <고래사냥>(84), <깊고 푸른 밤>(85), <겨울나그네>(85)에서 절정을 이루었다. 그러나 <황진이>(86)의 흥행적 참패와 함께 <안녕하세요, 하느님>(87)과 이석기감독의 <성 이수일뎐>(87)에서는 지나치게 형식적인 연기로 슬럼프라는 비판도 뒤따랐다.
하지만 이후 장선우 감독의 <성공시대>(88)로 새롭게 변신하였으며, 그 이후 박광수 감독의 <칠수와 만수>(88), 정지영 감독과 <남부군>(90), <하얀 전쟁>(92)등을 찍으면서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 하였다.
<투캅스>(93)의 코믹연기, <깊고 푸른밤>(84)에서의 야비함, <인정 사정 볼것 없다>(99)에서의 절제된 모습. 주어진 모든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진짜배우이다. 또한 그는 겹치기 출연이나 다작은 절대 금물로 여기며 오직 영화만을 고집하는 배우이기도 하다.
요즘은 신인감독들과 작업을 하면서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고, 언제나 변함없이 오늘도 한국영화를 위해 그는 카메라앞에 서 있을 것이다.
Religion: Catholic
서울 돈암 국민학교, 경동 중학교(국민가수 조용필과 동기동창), 동성 고등학교를 거쳐 한국외국어대 베트남어과를 졸업했다.
영화 기획과 제작에 종사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글도 배우기 전에 영화에 출연했는데, 57년 김기영 감독의 <황혼 열차>가 그의 첫 출연작이다. 이 영화를 필두로 그는 왠만한 영화의 아역은 도맡아 하였다. 이 가운데 1959년에 <10대의>에 출연해 대종상의 전신인 문교부 영화상의 문교부 장관상과 샌프란시스코의 영화상 골든 특별상(아역)을 받았다. 그러나 영화와 학교 생활을 병행하기가 힘들어 <얄개전>(59)을 마지막으로 70여 편의 출연 영화를 끝으로 아역 배우로서는 은막을 은퇴하였다. 이후 3수 끝에 외국어대 베트남어학과(1971년)에 진학하였다. 졸업 후 베트남으로 진출할 뜻을 가지고 있던 그는 ROTC를지원, 임관하면서 참모총장상을 받을만큼 열심히 했지만 이미 월남이 패망한 뒤라 전방에서 포병 장교로 군생활을 마쳤다. 제대후에는 중앙대 연극영화과 대학원에 지원했는데 공부도 쉽지않아 결국 한 학기만에 도중하차했다.
그러던 중 아버지의 권유로 1978년 김기영 감독의 <병사와 아가씨들>에 출연했다. 그러나 관객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고, 그 뒤에도 <제3공작>, <야시>, <우요일> 등에 조연으로 출연했으나 적응하기가 쉽지 않고, 반응 또한 기대 이하였다. 그러나 그의 진짜 재출발 선언은 대마초 해금 사건으로 돌아온 이장호 감독의 재기작 <바람불어 좋은 날>(80)로 이루어졌다. 이 영화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는 그 어느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최고의 연기를 보여 주었다. 특히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물 게 계산된 연기와 철저한 사전 준비, 그리고 천부적 재능과 끊임없는 자기 변신에의 노력은 수많은 영화제의 수상과 함께 국내 정상의 자리에 그를 올려놓았다.
임권택 감독의 <만다라>(81), <안개마을>(81)을 찍은 후 같은 세대의 배창호 감독과 짝을 이루어 8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루었고 조금 과장된 말로 그 당시 한국영화는 안성기가 나온 영화와 나오지 않는 영화로 로 구분될 정도 였다.
흥행은 물론 작품성도 모두 성공적이었다. 특히 <적도의 꽃>(83), <고래사냥>(84), <깊고 푸른 밤>(85), <겨울나그네>(85)에서 절정을 이루었다. 그러나 <황진이>(86)의 흥행적 참패와 함께 <안녕하세요, 하느님>(87)과 이석기감독의 <성 이수일뎐>(87)에서는 지나치게 형식적인 연기로 슬럼프라는 비판도 뒤따랐다.
하지만 이후 장선우 감독의 <성공시대>(88)로 새롭게 변신하였으며, 그 이후 박광수 감독의 <칠수와 만수>(88), 정지영 감독과 <남부군>(90), <하얀 전쟁>(92)등을 찍으면서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 하였다.
<투캅스>(93)의 코믹연기, <깊고 푸른밤>(84)에서의 야비함, <인정 사정 볼것 없다>(99)에서의 절제된 모습. 주어진 모든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진짜배우이다. 또한 그는 겹치기 출연이나 다작은 절대 금물로 여기며 오직 영화만을 고집하는 배우이기도 하다.
요즘은 신인감독들과 작업을 하면서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고, 언제나 변함없이 오늘도 한국영화를 위해 그는 카메라앞에 서 있을 것이다.
Filmography